삶을 바꾼 만남
2012년 유네스코는 인류가 기념해야 할 인물로 다산 정약용을 선정했다.
그는 사서오경을 연구하는 경학부터 정치, 사법, 과학, 의학, 건축, 음악에 이르기까지 500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 내용은 한결같이 정밀하고 전문성이 높으며 혁신적이다.
그의 삶 자체도 드라마 같다.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출셋길을 달리다가, 당쟁으로 40세에 강진으로 유배를 가서 18년을 곤궁하게 지냈다.
유배 중에 아들과 형을 잃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매섭게 정신을 세워 엄청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십 년 전 다산 초당에 간 적이 있었는데 얼마 전 그에 관한 제법 두툼한 책 두 권을 연이어 읽었다.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이 지은 《다산 정약용 평전》을 먼저 읽었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40여 년간 다산 연구에 매진해 왔다.
민주화 투쟁으로 감옥에 있으면서도 다산을 공부했고, 요즈음도 다산의 글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읽는다고 한다.
그는 다산이 책을 저술한 것은 금방 실행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훗날 그의 연가가 실천하는 데 꼭 필요한 이론으로 인정받기를 바랐던 것이라고 말한다.
평생 동안 한 인물을 스승으로 삼아 그리워하는 그가 부럽기 짝이 없다.
위 책에 정민 교수의 《삶을 바꾼 만남》이 인용되어서 곧 이를 구해 읽었다.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을 사람들이 역적이라고 피해서 다산은 간신히 주막집 방 한 칸을 얻어서 지냈다.
호구지책으로 동네의 아전 자식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는데 그 가운데 15세의 황상이 있었다.
그는 자산감이 없는 평범한 소년이었는데 어느 날 스승에게 부끄럽게 말문을 열었다.
"제게 세 가지 병통(결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둔한 것이요, 둘째는 막힌 것이며, 셋째는 답답한 것입니다."
이에 스승이 대답했다.
"배우는 사람에게는 큰 병통이 세 가지 있는게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는 외우는 데 민첩하면 그 폐단이 소홀한 데 있다.
둘째 글짓기가 날래면 그 폐단이 들뜨는 데 있다.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그 폐단은 거친 데 있다.
대저 둔한데도 들이파는 사람은 그 구멍이 넓어진다.
막혔다가 터지면 그 흐름이 성대해지지.
답답한데도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뚫고 틔우고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1802년 10월 10일의 일이었다.
소년은 그날을 잊지 않고 60여 년 동안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지켰다.
그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한촌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와 가까이 지내던 다산의 아들 정학연이 감탄하여 그의 글을 서울의 선비들에게 알려서 글 자체만으로 대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추사 김정희가 여러 차례 그의 시골집으로 찾아올 정도였다.
"소년은 감격했다.
서울에서 오신 하늘 같은 선생님이 너도 할 수 있다고, 너라야 할 수 있다고 북돋워 준 한마디가 소년의 삶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이 한 번의 가르침 이후 소년의 인생이 문득 변했다."
이 만남을 전민 교수는 위와 같이 쓰고 있다.
정 교수가 다산과 황상의 관계를 알게 된 과정도 흥미롭다.
우연히 한 논문에서 다산과 황상에 관한 짧은 글을 읽고서 그 관계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10년간 황상 관련 자료를 찾아 헤맸다.
관련된 문헌의 소장자를 물어물어 찾아가 하나씩 만났고,
다산이 황상에게 한 말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했다고 한다.
정 교수는 "청하지도 않았는데 황상이 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산은 어떤 스승을 만났을까?
다산은 퇴계를 만난 것을 이렇게 쓰고 있다.
"이 글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기뻐서 펄쩍 뛰기도 하고 감탄하여 무릎을 치며 감격의 눈물을 펑펑 흘렸다.
이 글에는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가 못에서 뛰는 뜻이 있다."
퇴계, 다산, 황상, 박석무와 정민…… 이 들이 시공을 넘어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 사이에 맑은 정신의 강물이 흐르고 있는 듯하다.
삶을 바꾼 만남이야말로 가장 복된 것이며, 그 비결은 가슴을 울리는 사람을 간절히 찾고 그리워하는 데 있는 것 아닐까.
-좋은생각 이천십칠년 일월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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