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생이다!! 107

낙법(落法)(정호승)

낙법(落法) -정호승- 내가 당신에게 배운 가장 소중한 가르침은 낙법이었다 당신이 당신의 생애 전체를 기울여 나를 메치고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어두운 골목길에 쓰러뜨리고 벼랑 아래로 힘껏 떠밀어버린 것도 결국은 나에게 낙법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넘어지면 넘어지면 되고 쓰러지면 쓰러지면 된다는 것을 새가 바람에 자신을 맡기는 것처럼 기차를 타면 기차에 나를 맡기는 것처럼 넘어지면 넘어진 곳에 쓰러지면 쓰러진 곳에 나를 맡기면 된다는 것을 진실로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넘어져도 제대로 넘어지는 법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는 데에 내 존재를 다하여 나는 가난한 당신의 사랑이 필요했다

혹시(김성장)

혹시 -김성장 며칠째 신발장에 운동화가 버려져 있다 주인을 찾아도 나타나지 않는다 내 발에 맞기만 한다면 갖고 싶을 만큼 아직 새것 일찌감치 무소유를 깨달은 아이들은 언제부터인지 물건에 집착하지 않는다 혹시 부처님인가 남의 물건을 탐내지 않는다 필요하면 눈에 띄는 대로 가져다 쓰고 버린다 그냥 아무거나 공용이다 쉽게 쓰고 쉽게 버리고 쉽게 잊는다 이런! 공용주의자인가 혹시 빨갱이인가 아무에게나 욕을 하고 교과서도 없다 자고 싶으면 자고 가고 싶으면 가고 학교 오고 집에 가는 일이 거침없는 놀라운 대 자유 위아래도 없고 좌우도 없음을 일찍 깨우쳤다 혹시 아나키스트인가 일찍이 교과서에 더 배울 게 없음을 알아버리신 분들 공부하기 싫으면 학교를 떠나라 해도 끈질기게 학교에 와서 저항한다 교사에게 성실한 친구들..

겨울 숲길에서 생긴 일

겨울 숲길에서 생긴 일윤재운 님 | 변호사 지난 연말에 며칠 동안 아내와 함께 충주호 근처의 조용한 동네에서 지냈다.마침 가까운 곳에 '자드락길'이라고 이름 붙인 숲길이 몇 개 있어서 하루에 하나씩 걷기로 하였다.첫날, 차를 몰고 솔숲으로 갔는데 숲이 가까이 갈수록 길이 좁아져서 나중에는 차 한 대만 간신히 지날 정도였다.워낙 외진 곳이어서 주차장도 따로 없었다.길가에 차를 조심스레 세우고 숲길을 한참 걷는데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다.우리 부부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부부로, 모두 스틱을 들고 있었다.서로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지나쳤다.새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눈 쌓인 적막한 겨울 숲길을 걷는 기분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두 시간여 걸은 뒤 되돌아왔는데 차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운전석 쪽 차..

비결은 없다, 그게 비결이다

비결은 없다, 그게 비결이다-윤성희 님 | 소설가 소설 《양과 강철의 숲》에는 피아노 조율사인 도무라라는 청년이 주인공으로 나온다.도무라는 열일곱 살에 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우연히 피아노 조율하는 광경을 본다.그 찰나의 순간을 그린 문장을 옮기자면 이렇다."그가 피아노 건반을 몇 군데 두드리자 뚜껑이 열린 숲에서 나무들이 흔들리는 냄새가 났다.밤이 흐르고 있었고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피아노 소리에서 숲의 소리를 듣게 된 뒤 도무라는 조율사의 세계에 빠져든다.하지만 재능과 꿈이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어서(혹은 우리 모두 드물다고 생각해서) 도무라 역시 초보 조율사가 되고도 끊임없이 회의를 느낀다.'나는 재능이 있는 건가? 좋은 조율사가 될 수 있을까?'이런 질문들. 그러다 어느 날, 자신을 조율사의 세계에 ..

[훈화] 오늘의 수고

오늘의 수고 매일 아침 정원에 떨어진 나뭇잎을 치우는 아이가 있었다.나뭇잎 치우기는 생각보다 힘들었다.특히 가을, 겨울에는 세찬 바람 탓에 낙엽이 정원을 뒤덮었다. 날마다 시간과 힘을 쏟던 아이는 금세 지쳤다.그래서 어떻게 하면 수고를 줄일 수 있을까 고민했다.'나무를 흔들어서 낙엽을 떨어뜨려 볼까?내일 몫까지 미리 치워 두는 거야.'아이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고 정원에 나가 나무를 세차게 흔들었다.평소보다 치우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지만, 내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즐거웠다.하지만 다음 날 정원에 나가 보니 낙엽은 평소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다.당황한 아이들 본 현자가 말했다. "얘약, 오늘의 수고는 오늘의 몫으로 충분하다.내일은 내일의 낙엽이 떨어지는 법이란다." -좋은생각 이천십칠년 삼월호 중에서

[훈화] 그놈의 욕심 때문에

그놈의 욕심 때문에 중국 남쪽 지방을 여행할 때 흥미로운 야생 원숭이 잡는 법을 들었다.상자에 조그만 구멍을 뚫고 그 속에 바나나를 넣어 두기만 하면 된단다.상자 구멍에 손을 넣어 바나나를 잡은 원숭이는 그걸 쥔 채로 손을 빼려고 애를 쓰는데,사람이 다가가도 손에 든 걸 놓지 못하다가 잡히고 만단다.놔 버리고 달아나면 될걸. 어리석기 짝이 없는 원숭이다.겨우 바나나 하나와 목숨을 바꾸다니.그놈의 욕심 때문이다. 욕심으로 말하자면 아프리카 진드기도 둘째가라면 서럽다.아프리카 오지 여행 중 시골 마을에서 민박을 하면 양이나 염소 등 가축들과 한 공간에서 지내기 십상이다.그러면 밤새 가축에게 작고 동그란 동물 진드기가 옮아 온몸에 들러붙는데,그냥 두면 몹시 가려울 뿐 아니라 고열과 두통을 일으키기 때문에 아침..

[훈화] 천 번의 두드림

천 번의 두드림 한 젊은이가 고생 끝에 사업을 시작했다.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갈수록 의기소침해졌다. 그는 기분 전환할 겸 산책을 나섰다가 나이든 석공을 보았다.석공이 망치로 큰 돌을 내려치자 반으로 쫙 갈라졌다.다른 돌 역시 마찬가지였다. 깜짝 놀란 그가 물었다."어르신, 힘이 대단하시네요. 타고난 겁니까, 아니면 비결이 있습니까?" 석공은 껄껄 웃었다."젋은이, 난 평범한 사람이라오."그러곤 돌을 내밀며 자세히 보라고 말했다. 단단한 돌에는 미리 쪼아 놓은 작은 구멍이 여러 개 있었다.어찌나 촘촘히 구멍을 냈는지 꽤 긴 시간을 들인 것 같았다."여보게, 한 번 쳐서 돌이 갈라진 게 아니라네. 갈라지지 않은 천 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네." -좋은생각 이천십칠년 오월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