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숲길에서 생긴 일
윤재운 님 | 변호사
지난 연말에 며칠 동안 아내와 함께 충주호 근처의 조용한 동네에서 지냈다.
마침 가까운 곳에 '자드락길'이라고 이름 붙인 숲길이 몇 개 있어서 하루에 하나씩 걷기로 하였다.
첫날, 차를 몰고 솔숲으로 갔는데 숲이 가까이 갈수록 길이 좁아져서 나중에는 차 한 대만 간신히 지날 정도였다.
워낙 외진 곳이어서 주차장도 따로 없었다.
길가에 차를 조심스레 세우고 숲길을 한참 걷는데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부부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부부로, 모두 스틱을 들고 있었다.
서로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지나쳤다.
새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눈 쌓인 적막한 겨울 숲길을 걷는 기분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두 시간여 걸은 뒤 되돌아왔는데 차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운전석 쪽 차체에 직선으로 굵은 줄이 길게 나 있는 것 아닌가!
줄 가운데 두어 곳에는 홈까지 깊이 패어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뽀죡한 것으로 눌러서 그은 게 틀림없었다.
외진 곳인데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산에서 마주쳤던 부부가 저지른 짓임이 분명했다.
그들 외에는 만난 사람이 없고, 스틱을 들고 있지 않았던가.
참기 어려울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데 왜 이런 짓을 했을까?
깨끗하게 닦인 새 차에 대한 시기심 때문일까?
다른 사람에 관한 말을 별로 하지 않는 아내도 흥분하여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당장 그들 뒤를 쫓아가 잡고 싶었다.
휴가 기분은 엉망이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당초 느꼈던 분노는 절망감으로 바뀌었다.
이런 행동의 밑바닥에 있는 악의까지 서늘하게 느껴졌다.
이런 행위가 일어나는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암울한 마음을 떨치기 어려웠다.
다음 날 모처럼의 휴가를 망칠 수 없어서 불쾌한 일을 잊기로 하였다.
호수를 도는 길로 차를 몰다가 호젓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한참 가다 보니 어제 주차하였던 곳이 다시 나오는 게 아닌가.
어제와 반대 방향에서 간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어제 지났던 좁은 도로를 조심스레 내려갔는데, 갑자기 차에스 '쿵쿵' 소리가 났다.
차량이 거의 지나지 않아서 길가에 나뭇가지들이 삐죽 나와 있었는데, 이 가지들이 차체에 부딪쳐서 나는 소리였다.
이때 번쩍하는 생각이 스쳤다.
어제 이 길을 올라오다가 지금보다 훨신 크게 '쿵' 소리가 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길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차의 바퀴가 밟는 소리로 생각했다.
'어제도 차체가 당연히 나뭇가지에 부딪쳤을 것 아닌가?'
차를 세우고 차에 난 흠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흠이 일직선으로 길게 생긴 것으로 보아 사람이 일부러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범인은 나뭇가지였다!
어제 숲길에 차를 세울 때 미처 이것을 못 본 것 같았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머쓱한 기분이었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그 부부를 비난한 우리가 서로 부끄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 깊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럼 그렇지! 어제 만난 그 부부가 그렇게 나쁜 사람일 리가 없지! 그렇게 보이지 않아썽.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정도로 나쁘지는 않아!'
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전문가에게 차를 보이고 흠집의 원인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았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스틱으로 인하여 난 흠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틱이었다면 색깔이 조금이라도 남아야 하는데 이 흠에는 색이 전혀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 사람은 얼마나 쉽게 오해하는가.
얼마나 함부로 남을 판단하는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
둘째 날 그 길을 다시 가지 않았다면 나는 내내 그 부부를 비난하며 우리 사회의 저급함을 한탄하였을 것이다.
내가 둘째 날 들었던 '쿵쿵' 소리가 첫날 났던 '쿵' 소리를 생각나게 하여 나의 오해를 풀어 준 것이다.
우리가 판단하고 행동한 것 중에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얼마나 많을까?
오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에게 섭섭해 하고 비난하는 것이 부랭과 다툼의 원인 중 하나 아닐까.
겨울 숲길에서 들었던 작은 소리가 나의 굳은 사고방식을 새롭게 점검해 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좋은생각 이천십칠년 삼월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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