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결은 없다, 그게 비결이다
-윤성희 님 | 소설가
소설 《양과 강철의 숲》에는 피아노 조율사인 도무라라는 청년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도무라는 열일곱 살에 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우연히 피아노 조율하는 광경을 본다.
그 찰나의 순간을 그린 문장을 옮기자면 이렇다.
"그가 피아노 건반을 몇 군데 두드리자 뚜껑이 열린 숲에서 나무들이 흔들리는 냄새가 났다.
밤이 흐르고 있었고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피아노 소리에서 숲의 소리를 듣게 된 뒤 도무라는 조율사의 세계에 빠져든다.
하지만 재능과 꿈이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어서(혹은 우리 모두 드물다고 생각해서) 도무라 역시 초보 조율사가 되고도 끊임없이 회의를 느낀다.
'나는 재능이 있는 건가? 좋은 조율사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
그러다 어느 날, 자신을 조율사의 세계에 빠져들게 한 조율사, 그러니까 체육관 피아노를 조율했던 선배 조율사에게 물어본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그때 선배 조율사가 도무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차근차근 수비하고 차근차근 히트 앤드 런(치고 달려라)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홈런을 노리면 안 되나고 충고한다.
이 책은 조율사가 되어 가는 한 청년의 이야기를 그리는데,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간절히 찾던 해답이 결국은 모든 사람이 간절히 찾던 해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가인 나는 "어떻게 하며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늘 하지만 답을 찾지는 못한다.
요리사는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내 음식을 먹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을까?"
또, 지금 고3이 되는 학생들은 이런 고민을 하겠지.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 그런 공부를 해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이런 질문은 하면 할수록 메아리가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결국은 내게 묻는 꼴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답은 없으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비결은 없으니까.
누군가 비결이 있다고 반박한다면 (그 말이 맞긴 하다. 맛집마다 요리 비법이 있고 공부 비법책도 팔리고 있으니) 그것은 자기 앞에 펼쳐진 문제집에서 서너 개의 답만 찾아내는 비결에 불과할 것이다.
카레를 맛있게 하는 비결이 손님들이 내 음식으 먹고 행복한 표정을 짓게 하는 비결과는 별개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차근차근 가야 한다는 선배 조율사의 말이 내게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누구나 아는 말, 평범한 말이라는 것도 나는 안다.
그런데 모르겠다.
그 말이 나를 위로했다.
오래전부터 내가 좋아했던 말도 떠올랐다.
스티븐 킹의 말인데, 그는 어떻게 하면 그 많은 책을 쓸 수 있는지 묻는 기자에게 이런 대답을 했다.
"한 번에 한 단어씩 쓰면 됩니다. 한 번에 한 단어씩. 차근차근."
어쩌면 내가 야구 시청을 좋아해서 남달리 공감했는지 모르겠다.
소설이 잘 써지지 않는 날이면 나는 프로 야구를 본다.
예전에는 글이 막힐 때 뇌 사진을 보거나 뇌의 모양을 상상하곤 했다.
이렇게 복잡하게 생겼는데 생각이란 게 어딘가에서 막힐 수도 있지.
이런 위로를 받는 것이다.
요즘에는 야구를 보며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타자도 열 번 타석에 들어서면 일곱 번은 삼진을 당하거나 병살타를 친다.
열 번에 세 번만 안타를 쳐도 그는 좋은 타자다.
열 번에 세 번 안타를 만들기 위해서 1루를 향해 힘껏 달린다.
슬라이딩도 한다.
아무리 좋은 투수라도 안타를 맞는다.
홈런도 맞는다.
완봉승은 생에 한두 번 올까말까 한다.
프로 야구 시즌이면 내가 좋아하는 선수들의 타율이나 방어율을 자주 확인한다.
그 숫자들은 완벽하지 않은 인간을 보여 주는 증거 같고, 그걸 보고 있으면 오늘 망친 소설은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오늘 조금이라도 쓴 게 어딘가. 내일 잘 써 보자.'
이런 낙관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슬럼프에 잘 빠지지 않아서 슬럼프를 빠져나오는 비결은 모른다.
슬럼프에 빠지지 않다니, 이런 오만한 말이 다 있다니.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슬럼프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매일매일이 슬럼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 않는다.
그냥 이런 생각을 한다.
언젠가는 열 번 중 세 번 안타를 칠 수 있는 타자가 되겠지.
그때까지는 그저 배팅 연습이나 하자, 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냥 대책 없이 믿는다.
그러니까 지금은 차근차근 수비하고 차근차근 히트 앤드 런을 할 때.
-좋은생각 이천십칠년 삼월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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