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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법(落法)(정호승)

낙법(落法) -정호승- 내가 당신에게 배운 가장 소중한 가르침은 낙법이었다 당신이 당신의 생애 전체를 기울여 나를 메치고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어두운 골목길에 쓰러뜨리고 벼랑 아래로 힘껏 떠밀어버린 것도 결국은 나에게 낙법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넘어지면 넘어지면 되고 쓰러지면 쓰러지면 된다는 것을 새가 바람에 자신을 맡기는 것처럼 기차를 타면 기차에 나를 맡기는 것처럼 넘어지면 넘어진 곳에 쓰러지면 쓰러진 곳에 나를 맡기면 된다는 것을 진실로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넘어져도 제대로 넘어지는 법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는 데에 내 존재를 다하여 나는 가난한 당신의 사랑이 필요했다

혹시(김성장)

혹시 -김성장 며칠째 신발장에 운동화가 버려져 있다 주인을 찾아도 나타나지 않는다 내 발에 맞기만 한다면 갖고 싶을 만큼 아직 새것 일찌감치 무소유를 깨달은 아이들은 언제부터인지 물건에 집착하지 않는다 혹시 부처님인가 남의 물건을 탐내지 않는다 필요하면 눈에 띄는 대로 가져다 쓰고 버린다 그냥 아무거나 공용이다 쉽게 쓰고 쉽게 버리고 쉽게 잊는다 이런! 공용주의자인가 혹시 빨갱이인가 아무에게나 욕을 하고 교과서도 없다 자고 싶으면 자고 가고 싶으면 가고 학교 오고 집에 가는 일이 거침없는 놀라운 대 자유 위아래도 없고 좌우도 없음을 일찍 깨우쳤다 혹시 아나키스트인가 일찍이 교과서에 더 배울 게 없음을 알아버리신 분들 공부하기 싫으면 학교를 떠나라 해도 끈질기게 학교에 와서 저항한다 교사에게 성실한 친구들..

아무도 모르게(이병률)

아무도 모르게 -이병률 당신 방에 앉아 침대 옆에 높인 시집을 읽습니다 당신이 비운 집 한쪽에 놔둔 식물에 물을 주라 하였기에 아무도 모르게 누워도 봅니다 냉장고에 들어 있는 술 한 병 꺼내 마셔도 좋다 하였기에 술만 마실 수 없어 달걀 두 개를 삶습니다 아, 희미한 삶의 냄새 이 삶은 달걀을 어디에 칠까요 무엇에 부딪쳐 삶을 깨뜨릴까요

이달의 시(2023)

학급운영을 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학생들이 시 한 편은 외웠으면 좋겠다. 그렇게 좋은 시를 찾다가 반시로 정한 것이 박노해 시인의 '꽃 피는 말'이다. '꽃 피는 말'은 반시이자 3월의 시로 가능하면 반 아이들이 모두 외울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한 달의 한 편씩 시를 소개하고 함께 읽는 시간을 갖는다. 학급게시용과 개인배부용 시를 첨부합니다.

학급을 바까 2023.07.11

봄길 -정호승 (이달의 시 후보작)

봄길-정호승 님(이달의 시 후보작)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있다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사랑이 끝난 곳에서도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사랑이 되어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